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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담배로 보는 한국사

DeveloperYong 2018. 6. 27. 15:56

왜 담배인가


오늘날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커피, 초콜릿, 술 담배 등은 현대인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기호품으로 자리매김하고있다. 일반적으로 '향기나 맛, 자극을 즐기기 위해 먹거나 마시는 것'을 의미하는 기호품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그 역할이 변화해 왓는데, 담배에 대한 인식 역사 마찬가지다. 한때 부와 지식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담배는 현재 '건강'이라는 문제 앞에 그 의미를 상실하였다. '웰빙(well-being)'이라는 말이 각광을 받으며 키워드로 새롭게 ㄸ오른 오늘날, 이제는 담배가 더 이상 기호품으로서의 긍정적 효과보다는 가난의 상징, 각종 질병과 사망의 원인으로 현대인들에게 각인되면서 멀리해야 하는 부벙적 이미지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직도 외부의 온갖 압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담배 예찬론자들, 애연가들은 담배에 대한 애정을 노래하고 있다. 지구상에는 30만 종이 넘는 식물이 있는데 그중 담배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식물도 드물 것이다. 담배가 아메리칸 인디언들로부터 유럽사회에 알려진 뒤로 처음에는 약초로서 기능했다가 점차 흡연용 기호품으로 사랑을 받으면서 인류의 생활과 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은 다 아는 바와 같다. 오늘날 건강과 위생상의 이유로 기피되는 담배라는 기호품을 통해 이것이 인간의 삶, 특히 한국인의 삶과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어떠한 기능을 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한국사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지표가 되리라 생각되므로 담배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그럼, 지금부터 담배라는 창을 통해 한국사의 일면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언제부터 담배를 피웠을까



아메리카에서 고대 마야인들은 담배를 신의 화신으로 여기고 종교 의식에 이용하거나 독충을 막는 데에 활용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원주민들이 의학적, 의례적으로 사용하던 담배라는 이 잎사귀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이다. 콜럼버스가 1492년 대륙을 발견하고서 인디언에게 담배씨를 얻어 유럽에 돌아와 자신을 지원해 준 스페인 왕실에 선물로 바치자 스페인 왕실에서는 담배를 재배하여 약초로 여기며 피웠다, 그것이 유럽에 널리 퍼지면서 아시아에도 전래되었고, 일본을 거쳐 조선에도 전해졌다.



http://principlesofknowledge.kr/archives/41888#_enliplehttp://www.ramshornstudio.com/tobacco.htm




그렇다면 담배는 우리나라에 언제 처음 들어왓을까? 담배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는 대개 16세기 말 ~17세기 초 무렵이다. 16세기 말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담배가 전해졌고,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급속히 보급되어 17세기 초에는 널리 재배되었다.


 담배는 전래된 초기에는 약초로 인식되어 전파력이 매우 컸다. 이숙광은 '지봉유설'에서 '담배를 피우면 가래가 없어지고 기가 내리며 술이 깬다.'라고 기록하였으며, '인조실록'에는 '담배를 피우면 소화가 잘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약초보다는 기호품으로 애용되면서, 담배의 수요 또한 급격히 증가하였다. 한번 담배를 피우면 중독성이 강해 쉽게 끊기 어렵기 때문에 보급속도가 아주 빨랐다. 
담배가 급속히 보급되자 피우는 사람이 많아졌고, 그에 따라 가격이 매우 비싸졌으며 귀한 물건으로 취급되었다. 관청에서는 담배를 은이나 종이 등의 물품과 함께 고리대 자금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담배는 병자호란 때 조선인 포로들을 송환해 올 때도 필요했다. 담배는 청국인들이 좋아하는 품목이라 은, 면포, 종이와 함께 가지고 가서 청나라 관료나 군인에게 주고 포로인 가족들을 데려왔다. 청국과의 무역에서도 담배가 많이 수출되었다.


조선 후기 흡연문화의 멋과 여유

담배가 전래된 후 급속히 보급되어 남녀노소 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담배를 피우게 되었다. 영조 19년(1742)에는 빈민들이 흉년을 당하여 먹고살 수가 없어 관청에서 쌀을 나누어 주었는데, 빈민이 관청에서 받은 쌀을 담배로 바꾸어 피우는 일이 발생할 정도였다. 그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굶어 죽으려고 하여 쌀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것을 도로 담배와 바꾸어 먹다니......"  하면서 논란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http://thekwack.tistory.com/11http://anystory.tistory.com/223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나이를 불문하고 담배를 피웠으며, 양반은 물론이고 평민 심지어 천민인 노비에 이르기까지 자유롭게 담배를 피웠다. 하물며 할아버지와 손자가 맞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신하들 역시 임금 앞에서 장죽을 길게 물고 국사를 논했다고 한다. 젊은이가 어른들 앞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담뱃불을 빌리는 것이 버릇없게 여겨지는 현대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담배 보급 초기와는 달리 17세기 후반 성리학이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 내리면서 담배를 피우는 행위에도 신분 간의 구별이 필요하게 되었다. 당시 양반층들은 평민과 천민층이 흡연하는 것을 전면적으로 금지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흡연을 인정하더라도 신분 간의 차별을 엄격히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담배를 피울 때 신분 간의 구별을 엄격히 규정하는 규율과 관습이 생겨났다. '비천한 자는 존귀한 분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 '아버지와 형님은 물론 연장자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 '길거리에서 연장자를 만났을 때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등의 여러 규율이 생겨났다. 이러한 사항은 법률적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관습에 의해서 당연시되어 이후 계속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다.


국채보상운동과 담배전매제도

조선 후기에 담배가 전래된 이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담배를 즐겨 피웠으며, 나름대로의 흡연문화도 만들어 갔다, 그러다가 일제가 우리 내정을 간섭하면서 침략의 손길을 뻗쳐 왔을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바로 1907년 나라 빚을 갚기 위해 금연운동으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다. 
 대구에서 시작된 이 국채보상운동은 급속히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서울에 국채보상기성회가 세워지고, 전국 각지에 의연금 수전소가 설치되었다. 정부 관리나 양반뿐만 아니라 상인, 농민, 학생, 부녀자, 기생, 승려 등 다양한 계층이 모금에 참여했다.

http://rigvedawiki.net/w/



담배의 소비가 급증하고 비옥한 밭에까지 담배를 재배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그 문제를 둘러싸고 왕과 관료가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일본과 청나라에서는 담배 재배 금지령이나 금연령을 내려 통제하고 처벌하기도 했지만, 조선정부에서는 극약 처방을 쓰기보다는 '비옥한 땅에는 담배를 재배하지 말라'등의 회유책을 펼쳤다.
 일단 사람들이 흡연을 하게 되면 그 기세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국가들이 어차피 흡연을 막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세금을 물려서 국고수입이나 늘려보자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였고, 그리하여 담배는 각 나라의 전매사업이 되었다.


양담배 단속과 담배시장 개방

해방 이후 전매청은 '승리'를 시장으로 여러 다맵를 발매하였으나 양담배가 미제라는 후광을 업고 인기를 얻었다. 당시 국산 담배는 궐련지에 풀칠이 제대로 되지 않거나 한쪽만 타들어 가는 등 불량품이 많았고, 또 공급 물량도 부족했기 때문에 양담배의 인기는 갈수록 더해 갔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양담배나 해외로부터 밀수한 담배는 화려한 디자인과 고급재로료로 만들어져 자신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했다.
 당시 양담배를 유통시키거나 피우는 것은 불법이었다. 정부는 매년 수시로 양담배 일제단속기간을 정해 단속하고, 위반자 명단을 신문에 싣게 했다. 양담배를 단속하던 1970년대 당시에는 특별 단속을 피하기 위해 국산 담배갑에 양담배를 넣어 다니는 일이 빈번했다.


http://news.joins.com/article/4618749http://www.samnam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79




 1988년  담배 시장이 개방된 뒤 양담배가 밀려들자자 이를 막기 위해 한국전매공사가 민간 기업 형태인 담배인삼공사로 이름을 바꾸고 국산 담배 애용을 장려했다. 이에 양담배 회사들은 담배보다 더 비싼 수첩, 볼펜, 라이터, 미니카메라를 키워 파는 불볍 거래행위를 했으며, 거리 담배 자동판매기를 설치했다. 이리하여 성인은 물론 청소년들의 흡연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양담배를 배격하자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당시 정부도 '국산 담배 애용' 캪페인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시대상을 반영하는 담배 상품


 해방 이후 현재까지 100여 종의 담배가 발매되었는데, 담배 이름은 당시 시대적 상황과 문화적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1945년 9월에 해방을 기념해 처음 생산된 담배는 '승리' 였는데, 일제로부터 해방된 기쁨을 표현한 이름이다. 같은 해 8월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기념하여 '계명'이라는 담배가 발매되었다. 1942년 선보인 최초의 군용 담배인 '화랑'은 1981년 말까지 32년간 맥을 이어 온 국내 최장수 담배로, 화랑도의 정신을 대변해 준다. 한국전쟁 중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라는 노랫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화랑'은 우리 민족의 애환이 담긴 담배로 군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http://jjongphoto.com/315http://www.g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7440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조국을 되살리자는 의미에서 새로운 조국 건설의 이미지를 부각시켜 '건설'이라는 담배가 나왔고, 1958년에는 국내 최초의 필터담배이자 두 번째 장수를 기록한 '아리랑'이 발매되었다. '아리랑'은 우리나라 담배 명칭 사상 유일하게 다시 사용되어 1988년까지 22년 동안 애연가들의 사랑을 받았다.1980년대에는 점차 세계화에 근접한 담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자는 의미에서 발매된 88패밀리 제품인 '88라이트', '88골드', '88멘솔'이 대표적이다.  1997년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체제극복의 염원을 담은 '시나브로'를, 2000년에는 남북 화해 무드를 반영하듯이 남북한이 공동으로 생산,판매하는 '한마음'이라는 담배가 나오기도 했다.
 이렇듯 담배 상품의 이름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는 당시 한국 사회의 시대상과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담배에 대한 인식과 금연문화의 확산


 쌈지 담배에서 장죽으로, 장축으로, 장축에서 권련으로 사람 사는 모양만큼이나 담배도 많은 변화를 겪어 왔다. 가난했던 1950~1960년대와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던 1970년대의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들을 함계 보낸 담배는 198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한 금연운동으로 인해 사회 전반에 걸쳐 부정적 이미지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갈수록 확대되는 금연 공간 등으로 흡연자들의 입지 역시 좁아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2000년까지만 해도 담배시장 규모가 5조 원에 육박할 정도로 담배가 기호품으로서 인기가 있었으나, 담배의 해악이 보다 널리 알려지고 금연운동이 더욱 뜨겁게 펼쳐지면서 담배 소비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흡연이 건강을 해친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볼 때, 흡연이 스트레스를 해소하거나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는 측면도 쉽게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금연으로 기운 상태다. 1987년 세계보건기구(WHO)가 담배와 관련된 각종 질병을 퇴치하고 담배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매년 5월 31일을 세계금연의 날로 제정하고 금연운동을 전개했다. 담배의 본산지라는 버지니아 주의 모든 식당과 바는 원칙적으로 금연구역이 되었으며, 뉴욕 시 또한 현재 전 사업장을 포함한 공공 실내에서의 흡연을 금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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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담배는 직접흡연자뿐만 아니라 간접흡연자에게도 해를 입힌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어 오늘날  '공공의 적'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대체 담배로 전자담배나 약초 담배 등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최근 전자 담배에서 발암물질과 환경호르몬이 검출되었다는 보도가 이어지면서 그마저도 환영받기 힘들어졌다. 담배가 확실히 이전에 비해 기호품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해 가고 있는 실정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건강을 위협하는 혐오스러운 물질로 인식되는 담배가 또 다른 이에게는 삶에 더없는 행복감이나 안락감을 제공해 주는 기호품이라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흡연에 대한 찬반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앞으로 담배를 대체하여 어떤 기호품이 각광을 받으며 새롭게 등장할지는 모르겠으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기호품에 대한 인식과 역할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며 새롭게 조명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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